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낯설게 보기/2012_라오스

2012_농끼에우[34]

농끼에우에 머무는 동안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게 해준 '핑'의 식당

 

점심 때쯤 되자 일주일은 계속 퍼부을 기세같았던 비가 주춤해진다. 허기진 터라 우산을 들고 숙소를 나선다. 다리를 건너는데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아이가 있다. 자세히 보니 어제 밥을 샀던 가게의 '핑'인 것 같아 핑이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. 마침 또 핑의 가게에 밥을 사러 가는 길이지만 새삼스럽게 반가워하는 것도 오버하는 것 같아 그냥 길을 걷는다. 핑의 가게에서 밥을 샀다.

 

게스트하우스가 밀집되어 있는 다리의 반대편 길로 걸어간다. 이왕 비도 그쳤고 산책도 할 겸 버스정류장의 위치를 확인해볼까 싶다. 길을 걷는 아이에게 한 번 묻고 어른에게 한 번 묻고. 말이 좀 다른 것 같다. 15분쯤 걸으니 버스정류장 팻말이 보여 들어가니 어제 도착했던 정류장이 맞다. 역시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. 매표소로 가 어제 봤던 직원에게 다시 한번 삼느아행 출발시간과 이동에 걸리는 시간을 확인한다. 돌아오는 길에 바나나와 오이를 샀다. 잘 익어 물렁해진 바나나가 정말 꿀맛이다. 라오스 여행 초반엔 군고구마홀릭이었는데 이젠 바나나홀릭이 될 것도 같다. 개미군단으로부터 이 바나나를 어떻게 사수하지?

 

정류장을 찾아 나서는 길

방 안에 두었던 축축한 빨래를 정원 빨랫줄에 넌다. 빨랫줄마다 크고 붉은 개미들이 줄을 지어 이동 중이지만 주인집 빨래도 아랑곳없이 널려있는 걸보니 나도 그냥 '버뺀양(괜찮아유~)'이다. 어제부터 화장실 변기가 잘 안내려가 주인아주머니에게 말하니 뚫어뻥을 들고 오신다. 잘 안되는지 5분 후에 아기 '원'을 안고 다시 왔기에 폴라로이드로 아기 사진을 찍어 건네주자 좋아한다. 이번엔 선 채로 찍어달라며 옆에 있는 꽃까지 꺾어 아기 손에 들려준다. '하나, 둘, 셋'하고 셔터를 누르는 찰나 '원'이 고개를 푹 숙인다. 고개를 숙인 채 찍힌 사진에도 아줌마는 “버뺀양”한다. 작은 것을 나눌 수 있어 기쁘다.

 

도시마다 평균 3박 4일을 머무는 편인데 이곳 농끼에우는 걸어서 둘러볼 곳이 더 없다고 형에게 문자를 보내니 검색을 통해 phatoke 동굴이 있다는 정보를 알려준다. 여기서 2km면 가까운 거리인 것 같은데 지도가 없으니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. 주인아줌마에게 파토케 동굴을 물어도 못 알아듣는 눈치. 내일은 정말 종일 해먹에서 여유롭게 뒹굴거리며 농끼에우에서의 마지막날을 보내야 할 팔자인가 보다.

 

해먹에 누워 보는 세상

 

농끼에우에 오고 처음으로 제대로 해먹에 누워본다.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데다 줄이 매여있는 나무도 삐거덕거려 불안했는데 누워보니 웬걸, 편안하다. TV에서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는데 요람을 타듯 살짝 흔들리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. 누운 채로 메모도 하고 책도 읽는다. 고개를 들면 안개가 끼인 산이 보이고 옆으로 돌리면 남우강이 보인다. 휴양지에 온 듯 처음으로 누려보는 호사. 우리돈으로 하루 4,500원에 이런 곳에 머물 수 있는 데가 또 있을까 싶다.

 

모처럼 메일을 확인해보니 많은 광고메일 사이로 반가운 룬스님의 메일이 보인다. 루앙프라방에서 마지막으로 묵는 날 술리냐와 룬에게 안부메일을 보냈었다. 룬은 메일에서도 특유의 유쾌함과 친절함이 묻어나는 듯했다. 내가 사양하지만 않는다면 자신은 이미 나의 친구이니 외로워하지 말라고 말해준다. 따뜻하고 그리운 룬, 라오스에서 만난 나의 첫 번째 친구. 비엔티안은 더 이상 내게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할 지 고민할 낯선 도시가 아니다. 룬과 술리냐를 만날 비엔티안에서의 시간이 기다려진다.

 

농끼에우의 풍경

 

내일은 비가 안 왔으면 좋겠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그저 다음날 눈을 뜨고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. 하지만 맑은 날이라면 그것에 감사하며 행복해할 줄 알고, 그렇지 않은 날은 또 그것대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줄 아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. 늘 무력하고 삶을 그저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 같은 나날이었던 나는, 꿈꾸고 그리던 라오스라는 세계를 오랜 기간 마음에 두고서 늘 머뭇거리고 있었다. 더 이상 이대로 살면 안될 것 같은 때에도 주저만 하고 있었을 때 형이 옆에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. 어쩌면 여행 전의 내 모습과 결코 달라진 게 없을 지라도 그건 그것대로 내가 받아들여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.

 

나는 지금 라오스에 와 있다. 멈추니 흐르고 싶고, 흐르니 멈추고 싶다. 내가 있던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했는데, 그 모든 것들이 내 발목을 잡아 내가 쉽사리 떠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, 떠나있는 지금, 내 자리를 생각한다. 내가 버틸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것들. 나는 지금 혼자 여행을 하고 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이다.

 

산 사이로 붉은 색이 번진다. 해지는 모습이 장관일 것 같은데 이곳에선 산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다. 아쉽다. 하늘에 잠자리 같은 곤충 수백마리가 날아다닌다. 어두워질수록 나에게도 다가오는데 자세히 보니 날개가 제 몸의 2, 3배만한 곤충이다. 해먹에서의 휴양지 놀이도 오늘은 이쯤에서 마감해야 될 듯 싶다. 방안 역시 모기들이 모여들고 자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책을 챙겨들고 정원으로 나온다. 아직도 빨래가 덜 말랐다. 빨랫줄을 따라 부지런히 기어가고 있는 빨간 개미떼들을 보며 차례차례 내 빨래에 침을 뱉고 지나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.

 

비온 뒤라 별이 더 밝을 것 같아 다리쪽으로 걸어갔다. 다리 아래 남우강에는 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그물손질이라도 하는지 손전등을 들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. 게스트하우스가 밀집되어 있는 곳은 불빛이 많아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. 가끔 지나는 차와 오토바이 불빛을 피해 다리 위에 서서 하늘을 본다. 많은 별이 반짝 거린다. 이 불을,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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