중은 제 머릴 못 깎는다지만

중은 제 머릴 못 깎는다는데 나는 이번에도 내 머릴 깎았다.
욕실에 들어가 가위를 갖고 어깨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을 몽땅몽땅 잘랐다.
애초에 자연스럽게 똥머리라는 걸 좀 해볼까 싶어 한 달이 넘게 인내심을 가지고
기르던 머리였지만 나는 또 충동적으로 단발머리보다 짧은, 커트 머리를 만들고야 말았다.

앞머리야 오래 전부터 내가 조금씩 잘라왔었다지만
옆머리와 뒷머리까지 내가 자른 지도 1년은 넘은 것 같다.
늘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도 맘에 들지 않아 2,3주는 지나야 길이 들까말까 했는데
내가 내 머릴 자르는 것은 그 순간부터 의외로 제법 흡족스럽다.
잘 보이지 않는 뒷머리야 말 그대로 내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내 알 바 아니고,
파마를 하러 갔을 때 내가 대충 자른 머리라는 말에 미용사분도
(듣기 좋으라고 한 소린지도 모르지만) 잘 잘랐다고 말해주었으니 크게 신경쓸 만큼도 아니다.

나는 머리를 잘 기르지 못하는 편인데 묶은 머리카락이 자주 내 머리를 무겁고 답답하게
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지만 갑작스럽게 기분에 따라 머리를 자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
바로 실행에 옮기기 때문이라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.
그러고 보면 TV 속 드라마에서 실연을 당한 여자가 긴 머리를 몽땅 자르고 변화를 추구하는
흔한 레퍼토리가 아주 신빙성없는 것만은 아니다.
비록 실연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내 안에서도 작은 심경의 변화가 일 때마다
충동적으로 머리를 잘라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.

최근에 나는 한동안 좀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다.
그 기간 동안에도 인내심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길러왔던 머리카락을,
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계절의 변화를 감지해야겠다고 살짝 힘을 낸
이 시점에서 갑작스레 잘라버린 건 좀 웃긴 일이지만 말이다.
그나마 충동성의 표현대상이 정확히 내 소유의 것이며
다시 자라기까지 하는 머리카락이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.
나는 앞으로도 내 충동성을 이렇게나마 분출할 수 있으니 말이다.
더군다나 머리모양이 마음에 쏙 들기까지하니...

하지만 다른 사람 머리는 못 잘라준다는 건 함정이다.
나의 손길을 받고난 뒤 미용실로 간 룸소울메이트 L씨는,
머리를 손질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미용사에게
전에 투컷블럭을 했었냐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 또한 비밀이다.